[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18> '4할타자' 백인천 "이대호가 날 미워해도, 난 좋아" ⓛ편
입력: 2012.02.01 11:35 / 수정: 2012.02.01 11:35

▲ 전설의 4할 타자 백인천이 코리언 레전드가 돼 돌아왔다.
▲ '전설의 4할 타자' 백인천이 코리언 레전드가 돼 돌아왔다.


▶[동영상] '전설의 4할 타자' 백인천, 그때 그 방망이

선각자의 길은 거칠고 힘들지만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는 길이다.

50년 전 한국인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백인천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유일하게 4할 대 타율을 달성한 전설의 타자다. 1990년 LG 트윈스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면서 감독으로도 야구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1997년 삼성 감독 시절 뇌출혈로 쓰러져 야구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었지만 불굴의 집념으로 다시 일어서 야구계로 복귀하며 후배들의 정신적 지주로 거듭나고 있다. '코리언 레전드' 18번째 주인공으로 선정된 백인천을 최근 일산 자택에서 만났다. 오늘 날 백인천의 밀알이 된 반세기 전 일본 시절 일화와 한국 야구를 향한 뼈 있는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 일산 자택에서 만난 백인천(69) 전 야구 감독 / 노시훈 기자.
▲ 일산 자택에서 만난 백인천(69) 전 야구 감독 / 노시훈 기자.

- 코리언 레전드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팬들이 나를 잊지 않고 찾아준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감사드립니다. 차 한 잔 하면서 좋은 이야기 나눴으면 해요. 뇌출혈 이후 건강에 프로가 됐어요. 덕분에 최근 무료로 직장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야구 교실을 운영하죠. 1~2시간씩 야구를 하고 점심도 같이 먹는데, 참 좋더라고. 3월에는 자서전을 낼 계획인데,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건강 서적도 함께 출간할 예정이에요.

- 자서전은 어떤 내용인가요.

1960년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등 남달랐던 집념의 시간들을 담았죠. 담당 작가한테 거짓된 내용을 쓰지 말라고 당부해요. 나쁜 짓을 했어도 다 넣어달라고.(웃음) 남자가 실수할 수 있지. '백 감독은 여자관계도 없었고, 술도 안 마셨느냐'고 묻는데 '아니다'고 하면 거짓말. 단, 프로로서 지식과 노력, 경험이라는 세 가지를 보일 줄 아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 올 시즌은 해외파 복귀로 한국 프로야구 '풍년의 해'라고 불리는데요.

박찬호는 미국 생활 초기에 플로리다에서 나와 2시간 정도 얘기를 나눴어요. '너 요즘 많이 울지?'라고 하니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내가 이놈아, 19살 때 일본 건너가서 서러움 받고 울었으니까'라고 했지. 선배가 타국에서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것에 고마워하더라고. 찬호는 서러움을 알았기에 성공했죠. 언젠가 한국에서 뛰고 싶다는 그리움이 컸어요. 성적을 떠나 한국 팬 앞에 선다는 게 좋죠. 몇 승하라는 건 의미 없다고 봐요. 이승엽도 아쉽지만 할 만큼 했죠. 김태균, 이범호와 함께 일본 야구를 접한 후배들이 한국에서 뛰면 그만큼 우리가 일본 야구 수준과 가까워 질 수 있겠죠.

▲ 백인천은 반 세기 전 일본 현역 시절부터 희로애락이 점철된 인생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줬다.
▲ 백인천은 반 세기 전 일본 현역 시절부터 희로애락이 점철된 인생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줬다.

백인천하면 이대호와 쓰라렸던 인연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올 시즌 일본 오릭스 유니폼을 입은 이대호는 프로 데뷔 후 줄곧 다이어트와 사투를 벌였는데, 2002년 백인천은 롯데 감독을 맡았을 때 그에게 "너무 뚱뚱하다"며 체중 감량 훈련을 지시했다. 사직구장 스탠드를 오리걸음으로 오르내렸다. 그러나 이대호는 왼쪽 무릎 반월 판 연골이 파열돼 그해 겨울 수술대에 올랐다. 그러나 이대호는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이 오히려 성장의 디딤돌로 돌아와 현재 백인천에 대한 서운함을 잊은 지 오래다. 올 시즌에는 옛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 일본 야구 정벌에 나서게 됐다.

- 이대호가 오릭스로 진출하게 됐을 때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은데요.

물론이죠. 나한테 참 많이 혼났었는데.(웃음) 내가 얼마나 미웠겠어요. 지금은 미안함보다는 고맙네요. 본인이 알거예요. 수술까지 했었는데…. 그러한 고초를 겪었기에 투지가 생겼고요. 자식 같은 선수였는데 나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 맹수의 세계에서도 어미가 새끼를 강하게 키우려고 매몰차게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한 과정을 견디고 일본에 가게 된다니까 정말 좋더라고. 이대호가 날 미워해도 난 좋아.(웃음) 성공했다는 게.

▲ 롯데 시절 이대호와 인연은 잊을 수 없다는 백인천.
▲ 롯데 시절 이대호와 인연은 잊을 수 없다는 백인천.

1960년 4.19가 나던 그 시절, 경동고에 다녔던 백인천은 야구 천재로 불렸다. 당시 야구공이 반발력도 그저 그렇고 방망이도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홈런은 귀했다. 백인천은 제15회 청룡기 쟁탈 고교 대회에서 서울운동장 야구장 개장 이래 고교 선수 첫 홈런을 때려 주목 받는다. 3학년 때인 1960년 10월에는 일본 원정에 나서 8차례 경기를 치러 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고교생 홈런타자 백인천에 눈이 쏠렸고, 특히 도쿄 메이지 진구구장에서 열린 일본대학 제2고와 경기에서 터진 홈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진구구장에서 나온 두 번째 홈런이었다. 진구구장은 고라쿠엔 구장과 함께 도쿄를 대표하는 구장으로 도교 6대학 리그 경기와 프로야구가 열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1962년 1월 자유중국(대만)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대회 유일한 홈런을 때렸다. 경기 후 백인천은 일본 야구 관계자들로부터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할 수 있는 타자"로 주목 받았다. 도쿄 6대학 리그의 명문 메이지대학은 학비까지 지원하겠다며 입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인천을 붙잡는 데 성공한 구단은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니혼햄 파이터스)였다. 당시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기 전이었고, 양 국의 교류는 제한적이었다. 다행히 숱한 사회적 논란과 반일 감정의 벽을 뚫고 1962년 1월 일본행을 확정지었다. 19살의 햇병아리 선수가 일본 프로야구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 1962년 한일 국교 수립 이전에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백인천은남모를 고초를 겪은 끝에 대한해협을 건넜다.
▲ 1962년 한일 국교 수립 이전에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백인천은
남모를 고초를 겪은 끝에 대한해협을 건넜다.

- 당시 분위기가 어땠나요?

일본행 확정이 보도되고 하루 편지가 50통 넘게 왔어요. 격려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10개 중 9개는 '에라이, 매국노야!'라며 돼지 피로 쓴 혈서도 있었어.(웃음) 19살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당시에는 프로라는 의식이 없었지. 돈에 팔려간다는 시선이 컸어요. 하지만 사회 유력 인사들이 일본행을 지지해줘 가게 됐죠. 오히려 매국노라는 편지를 보낸 분들도 나를 좋아하기에 채찍질하고 있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다짐으로요.

- 본의 아니게 오기를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요.

일본 가기 전에 선배 야구인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보통 후배가 해외에 나가게 되면 요즘에는 '열심히 하라'고 하잖아요? 당시에는 '네가 가서 될 것 같니, 생각 좀 해라', '네 동창인 김성근이도 일본서 한국으로 왔는데 네가 더 잘하는 것도 아니고'라며 무시를 했다고. 그 말에 정말 큰 상처를 받았어요. 당장 모레 떠나야 되는데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웃음)

- 일본에 처음 도착했을 때 기분은 어떠셨나요?

하네다 공항이 예전에는 작았어요. 디지털 시대도 아니었고, 사진 기자들이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녔는데 내가 공항에 입국했을 때 200여 명의 일본 기자들이 왔죠. '나 같은 놈이 오는데 왜 이리 많이 왔지?'라고 생각했죠.(웃음) 당시 시대 분위기상 스포츠를 넘어 정치적인 이슈로 떠올랐어요. 인터뷰를 할 때 '일본에서 열심히 배우겠다. 그리고 성공 하겠다'고 한 기억이 생생해요. <①편 끝>…②편은 백인천의 일본 정복, 제2의 꿈 등이 이어 집니다.

▶ '4할타자' 백인천 "日 구심, 멱살 잡고 내동댕이쳐…" ②편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노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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